유비가 되고 싶었던 왕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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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Lp1aE091 작성일20-07-29 22:35 조회348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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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미갤에서 흥하는 후삼국 관련하여 이번 글에서는 유비가 되고 싶었던 왕건 떡밥을 투척해보려고 함

후삼국 왕건에 삼국지 유비까지 초대형 떡밥이 될 수 있는 글 같지만
하지만 어림도 없지!!!
사실 이번 글에서 소개할 왕건은 고려의 왕건이 아니라 중국 오대십국시대 촉나라를 세운 왕건이야
* 참고로 이 촉나라의 왕건과 고려의 왕건은 한자(王建)까지 일치하는 완벽한 동명이인이며 같은 시대를 살았어
* 촉나라 왕건 827년생 고려 왕건 877년생, 그리고 이 촉나라의 왕건이 죽은 918년에 고려의 왕건이 궁예를 몰아내고 제위에 오름
* 정신나간 환빠들은 이 촉나라 왕건이 고려의 왕건과 같은 사람이라며 대륙고려설(개소리 왈왈)을 주장하기도 해

이 중국인 왕건은 주원장급 흙수저로 태어났는데.
<신오대사>에서 그는 어린 시절 '의지할 곳 이 없던' 인물로 묘사했어

그리고 이런 환경에서 먹고 살기위해
백정일을 하였지만,
그것만으로도 생계를 잇기 어렵자 차츰 어둠의 길로 빠지게 되는데,
소금 밀매업은 물론 아예 유명한 도적으로 성장하여
그의 고향(허주 무향)사람들은 그를 적왕팔(도독놈 왕팔) 이라고 불렀는데,
그 악명이 어찌나 높았던지 오늘날에도 '왕팔' 이라는 단어는 중국의 대표적 비속어 중 하나로 전해져 내려와(영고라인 가입ㄷㄷㄷ)

결국 고향에서는 도저히 살 수 없을 지경이 된 그는 고향을 떠나 충무군(忠武軍)에 투신 하였는데,

거기서는 마음을 잡고 피나는 노오력을 통하여 마침내 부대의 관원으로 승진하는데 성공했어

그러나 이번에는 당나라 자체가 망해버릴 위기에 쳐해버렸는데,
바로 역사상 유명한 '황소의 난'이 일어난 것으로,
황소의 반란군은 수도 장안까지 쳐들어와 당 희종 이현은 사천(촉땅)으로 몽진을 떠나게 되었어
이때 많은 관리, 무장 등이 빤스런 하였으나,
왕건은 끝까지 당 희종을 수종을 하기 위하여 그 뒤를 따랐는데,
그에 감동한 당 희종은 왕건을 수가오도에 봉하고,
대환관 전령자에게 그를 돌봐주도록 하였어
* 그리고 환관 전령자는 아예 이 왕건을 자신의 양아들로 입적하였지

이때부터 왕건의 인생은 드디어 팔자가 피기 시작하는데,
황소의 난이 진압되고 장안으로 돌아온 당 희종은 왕건을 '신책군통수'에 임명하여 궁궐을 수비하는 임무를 맡도록 했어

물론 그와 별도로 당 제국 자체가 워낙 망조가 들은 상태였기 때문에,
왕건의 인생은 여전히 파란만장 하였는데,
당 희종은 또 다시 역모로 인하여 봉상으로 피난을 가고 그 이듬해에는 다시 홍원으로 피난을 갔는데.
이때 '청도사'에 임명되어 황제의 호위를 맡았던 왕건은
목숨을 걸고 그 임무를 수행하였는데.
특히 이창부가 이끄는 반란군이 절벽길을 불태워 길이 거의 끊겨버릴 지경이 되었을때 왕건은 황제가 탄 말고삐를 잡고 불길을 뚫고 건너갔으며,
그날 밤 당 희종은 산속에서 노숙을 하게 되었는데,
왕건의 다리를 베고 잠 들었다가 잠에서 깨고는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용포를 벗어 왕건에게 입혀주었다고 해

이후 왕건은 영평군의 절도사가 되어 조정의 명령을 불복한 진경선을 토벌할 임무를 맡게 되는데,
이 진경선의 동생은 바로 왕건의 양아버지로 모셨던 대환관 전량자였어(전량자: 아들아 무엇을 하는 것이냐?)
물론 반란군의 세력도 강성했기에 이 반란의 토벌이 결코 쉬운일은 아니었는데,
이것이 오히려 왕건에게는 기회가 되었어
왕건은 자신과 함께 반란군 토벌의 임무를 공통으로 맡고 있던 위소도에게 반란 진압 실패의 책임을 물어
"여기는 내가 담당할테네 너는 장안으로 돌아가라"고 은근히 협박을 했어
위소도는 처음에는 이에 따르지 않았지만,
왕건이 위소도의 심복을 죽여버리는(군량을 훔쳤다는 죄를 뒤집어 씌움) 등 대놓고 무력시위에 나서기 시작하자 결국 장안으로 빤쓰런 하였으며,
이후 온전히 토벌군에 통솔권을 쥐게 된 왕건은 먼저 반란군의 근거지인 사천과 다른 지역의 교통을 끊고 성도로 출병하여.
마침내 반란군 수괴 진경선과 양부 전량자의 목을 따 당나라 조정에 바쳤어

이렇게 반란군 수괴들의 목은 당 조정으로 올라갔지만, 그 지역은 그대로 왕건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그 영역은 사천성 촉부와 섬서, 한중 일부 지역에 이르러,
왕건은 이때부터 옛 유비의 땅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하여 자립할 생각을 품게 되었고,
901년 이무정을 공격하여 한중을 오롯이 자신의 것으로 차지하여
마침내 옛 유비의 땅을 모두 차지하게 되었으며,
그 세력을 두려워한 당나라 조정은 903년 그를 '촉왕'에 임명하였어
(* 자칭 한중왕 이었던 유비와 달리 조정의 공식 임명장을 받음 엣헴!!!)

그리고 907년 주전충이 마침내 당나라를 폐하고 후량을 건국하자,
왕건은 이를 명분으로 본인 또한 자립하여 황제로 등극하였는데,
(이거까지 그대로 유비를 따라하네- 유비가 되고 싶었고 마침내 유비가 된 왕건!!!)
물론 그 나라의 이름은 '촉' 이었고 수도는 '성도'였어
* 이때 그의 나이 56세

왕건은 간언을 잘 받아들였으며, 관리를 잘 선발해 각자의 능력에 맞게 쓸 줄 알았고 검소함까지 겸비했다. 그는 비록 배우지 못했지만 지식인들을 중시했다. 당시 당나라의 많은 선비들이 촉나라에 피난을 와 있는데, 그들과 자주 담론을 즐겼으며 그들을 예로써 대하고 임용했다.- <자치통감 226권>
그리고 촉나라 황제 왕건은 자치통감의 묘사대로 개념있는 통치를 행하였는데, 농업과 잠업을 중시하였고 전쟁 또한 피하여(동오로 꼬라박한 유비 보다 훨 낫네) 백성들의 생활은 안정되고 경제와 문화가 크게 발달 하였으며, 국방에도 소흘함이 없었어

그러나 그는 통치후기로 가면서 이궁의 변(?) 비슷한 것을 일으키는데,
한때 그와 전장을 누볐던 부하장수들 대부분의 그의 손으로 숙청을 당하고 말았어 ㄷㄷㄷ
*이 왕건은 현대로치면 게슈타포나 남의사와 비슷한 심사단 이라는 것을 만들어 정적들을 제거하는 공포정치의 도구로 사용함

물론 그와 비슷하게 맨주먹에서 일어나서 황제까지 오른 주원장 또한 엄청난 숙청을 하였 듯이.
이러한 창립군주의 숙청은 후대를 위하여 필요한 부분도 있을 수 있으나(물론 통일왕조의 군주였던 주원장과 달리 왕건은 중원 천지 중 촉땅 하나만을 차지하여 여전히 다른 나라들과 천하패권을 두고 다퉈야 했다는 중대한 차이가 있지만)
그렇게 보기에는 안타깝게도 왕건은 후계자 문제 또한 제대로 처리하지 않았는데,
그의 친아들들은 물론 양자들까지 가세한 치열한 후계자 다툼 끝에 11번째 아들 왕연이 황위에 올랐으나
* 왕건은 16년을 다스린 후 72세의 나이로 사망함

황음무도하여 사치와 주색에만 빠지고 정치는 환관에게 맡기는 등(손호+유선의 조합 ㄷㄷㄷ)
막장통치를 하다가 7년만에 후당의 공격을 받고,
촉은 멸망하여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어
* 후일 맹지상 이라는 인물의 다시 촉나라를 세워 이 왕건이 세운 촉은 전촉, 맹지상이 세운 촉은 후촉으로 불리게 됨

이상으로,
왕건의 이름을 가지고 주원장과 같은 환경에서 태어나 여포처럼 양아버지를 척살하고 유비의 땅을 근거지로 치세를 이뤘으나 손권 같은 말년을 보냈던,
촉나라 황제 왕건에 대한 소개글을 마칩니다. 읽어주신 분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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